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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호 손소인 러브스토리 및 인생 이야기

 

최백호의 인생은 굉장히 다사다난했습니다.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의 죽음, 인기 여배우 김자옥과의 결혼과 이혼으로 인생의 전반기를 방황으로 보내게 됩니다.

다만, 김자옥과의 이혼 이후의 행동은 주목할 필요가 있네요.

 

또한 최백호는 아내 손소인과 재혼을 하는데, 그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립니다.

이때 손소인이 보여준 행동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가수 최백호는 1950년 4월 23일 부산에서 태어납니다(최백호 고향). 올해 65살이죠(최백호 나이).

(최백호 종교) 개신교

(최백호 학력 학벌) 가야고등학교

(최백호 프로필 및 경력) 1977년 노래 '내마음 갈곳을 잃어'로 데뷔

 

이후 내 마음의 노래, 입영전야, 영일만 친구, 고독, 소녀야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한동안 침체기를 겪다가 잠정 은퇴해서 미국에서 라디오 DJ활동을 하기도 하다가 다시 국내로 복귀해서 1994년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합니다. 이노래는 1995년부터 큰 인기를 얻었고, 최백호의 대표곡이 됩니다.

 

 

# 목차(글은 아래의 목차 순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최백호 아버지 최원봉과 어린 시절

* 최백호 예술성 각성

* 어머니의 죽음과 결핵

* 클럽 가수의 노래

* 최백호 김자옥의 결혼과 이혼

* 최백호 재혼

* 최백호 아내 손소인의 성격과 처가의 도움

* 낭만에 대하여 발표와 그 뒷이야기

* 최백호 아내에 대한 불만 토로

* 최백호 딸과의 불화

* 최백호의 인생에 대하여

 

최백호 과거 사진 젊은 시절

 

* 최백호 아버지 최원봉과 어린 시절

 

최백호 아버지 최원봉(이름)은 대한민국 제 2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당시 28살의 나이로 당선된 시대의 풍운아였죠(최백호 아버지 직업).

 

하지만 6.25 전쟁 당시 교통사고(터키군의 수송차량과 충돌)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최백호가 태어난지 겨우 5개월된 때였죠.

 

최백호: "할아버지가 아주 부농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굉장히 싫어했죠.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었지요. 흔히 하는 말로 "애비 잡아먹은 자식"이라고 생각하셨던 겁니다. 때문에 할아버지는 저에 대한 노여움이 아주 많았죠. 하다못해 학비 한번 안 대주셨어요. 이건 개인적인 가정사지만 지금도 삼촌들과 왕래를 안하고 있어요."

 

이렇게 최백호는 친가와 연을 끊고 지냅니다.

따라서 최백호 가족(어머니와 누나 2명)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최백호: "어머니는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때문에 전근을 많이 다녀야 했던 어머니를 따라 저 역시 어릴 적부터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죠. 결국 어머니께서는 당시 교사가 받던 박봉으로는 도저히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없다며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했어요."

 

최백호: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인지 몰라도 조금은 조숙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에 대한 정도 모자랐고 어릴적부터 혼자 있을 때가 많아 어쩌면 상당히 빗나갈 만한 여건이었는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너무나 많이 들어왔는데 그게 저에겐 거의 신화처럼 다가왔어요. 때문에 제 머리맡엔 항상 아버님 사진이 있었어요. 돌아가셨지만 늘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준 버팀목이 되셨거든요. 아마 그런 아버님 때문에 빗나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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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호 예술성 각성

 

가난과 아버지의 부재는 최백호를 일찍 철이 들게 만듭니다.

최백호: "내 노래중에서 2, 3곡을 빼놓고는 다 내가 직접 작사 작곡한 곡들이다. 잦은 전학과 아버지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무 위에 올라가 습작하던 습관이 내가 스스로 노래를 만들게 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최백호는 어린 시절부터 외로움을 습작을 통해서 해결해 나갑니다.

그리고 습작외에도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고, 또 그의 어린 시절 꿈은 영화감독이었습니다.

 

최백호: "제 오랜 꿈은 가수가 아니라 영화감독이었어요. 구체적으로 영화감독이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였죠. 사실은 모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합격했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진학을 포기했어요. 대학에 재학중인 누나가 둘 있었는데, 어머니의 수입으로는 저까지 대학을 보낼 수 있는 처지가 안됐어요. 어머님께서 ‘1년만 기다렸다가 대학에 다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혼자 그림공부를 했었어요."

 

예전에는 이럴 경우에 딸보다 아들을 우선시했는데, 최백호 가족은 그렇지 않았네요.

최백호 어머니에게는 남녀 차별 의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어머니의 죽음과 결핵

 

최백호가 재수를 하던 해 10월 어머니가 갑자기 사망하게 됩니다(1970년 10월).

 

최백호: "어머니가 가게를 열어 적은 돈이나마 벌어 볼 희망에 부푼 것도 잠시, 어머니께서 췌장암 판정을 받았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세 들어 살던 가게는 이내 처분했죠."

 

결국 최백호는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입대 반년만에 그는 결핵을 앓게 됩니다(1971년 1월 입대, 12월 제대).

 

최백호: "마산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거기는평생 있고 싶은 곳이었어요. 하지만 결핵 환자 보상금 11만5000원을 주고는 나가라고 하더군요. 당시 학업과 직장 때문에 흩어져 살고 있던 누나 둘에게 의지할 수가 없었어요."(최백호 의가사 제대)

 

사실 일제시대때는 결핵에 걸렸다는 것은 곧 사망선고나 다름없는 중병이었습니다.

이후 차츰 치료율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결핵의 치료법은 잘 먹고 푹 쉬어야 하는 '부자병'이었죠.

최백호가 앞이 캄캄했을 것 같네요.

 

 

 

결국 최백호는 경남 동래군의 일광해수욕장 인근의 가장 싼 방을 구해 혼자 요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월세를 낼 돈이 떨어지자 산속에 들어가서 오두막을 지어서 기거하게 되죠.

 

최백호: "당시 중고 기타하나 들고 산속으로 들어갔어요. 2년간 이어진 지독하게도 힘들었던 시간은 어쩌면 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습작하는 데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준 기회였는지도 몰라요."

 

이때 최백호의 예술성이 크게 함양되었을 것 같네요.

아마 최백호의 노래에 쓸쓸함과 고독이 짙게 묻어나오는 것은 이런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최백호 과거 사진

 

* 클럽 가수의 노래

 

약 2년간의 요양을 통하여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부산 클럽에서 노래를 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1973년 12월).

 

최백호 친구: "우리 매형이 부산 서면에 통기타 라이브 클럽을 하나 여는데 통기타 치면서 노래할 가수가 많이 필요하단다. 내랑 같이 가수 구하러 댕기게 부산으로 온나."

 

이때 최백호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짙은 음색으로 큰 인기를 얻게 되고, 서울로 진출하게 됩니다(1974년 당시 대형 음반사였던 서라벌레코드사의 소속 가수가 됨).

 

최백호: "사는 게 절망적이었는데 통기타를 들고 노래하는 순간 돈이 생기더라고요. 노래를 하면서 ‘좋다’, ‘즐겁다’ 하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이거 하면 돈 나오고 배도 안 고프다’ 그 생각이었죠."

 

결국 이렇게 최백호는 '먹기'위하여 통기타 가수가 됩니다.

그리고 1977년 그의 데뷔곡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를 발표하죠.

 

 

최백호: "사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면서 쓴 가사예요. 전쟁이 나던 해에 내가 태어난지 5개월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내 나이, 스무 살 가을에 어머니가 떠나셨어요. 어머니를 여읜 이듬해에 부산의 어느 허름한 거리를 거닐다가 쓴 가사예요. 사람들은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리는 가사지만, 전 어머니를 그리면서 노래를 불렀어요. 사람들이 제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억지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가 살면서 겪은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사실 대중앞에 나타났던 최백호의 첫모습은 굉장히 이색적이었습니다.

보통 남자 가수의 경우 젊고 잘생긴 사람이 세련된 옷을 입고 대중앞에 화려하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최백호의 경우는 그냥 경상도 어느 산골 초등학교 선생님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죠.

그리고 이런 그의 실제 모습이 최백호의 음악과 잘 맞아떨여져서 처음에는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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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호 김자옥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1980년 당시 최고의 여배우중의 한명이었던 김자옥과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불과 3년만에 이혼으로 끝나게 되죠.

 

(최백호 김자옥 이혼사유 - 성격 차이)

김자옥 최백호 사이에 자녀는 없었음(최백호 전부인 전처)

 

 

그런데 주목할 점은 최백호나 김자옥이나 모두 이혼한지 1년 뒤인 1984년 재혼을 했고, 그 배우자와 여전히 잘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 둘다 사랑에 대해 실망했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실망하지 않았는 것 같네요.

(김자옥 전남편 최백호)

 

김자옥 과거 사진

 

 

사실 최백호 집안이 정치인 집안(아버지가 국회의원)이라고는 하지만, 벌써 옛날에 사망했고, 최백호의 경우는 인기를 좀 얻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앞날이 불안한 신인급 가수(?)중의 한명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김자옥과 최백호의 결혼에 대해서 '서로 격이 맞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등의 말들이 많았죠.

 

사실 김자옥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여배우중의 한명이었고, 아버지 김상화가 시인겸 우성 영화사 전무로 있었습니다. 집안의 재산 역시 꽤 풍족했죠(최백호 김자옥 이혼이유).

 

 

* 최백호 재혼

 

이후 최백호의 재혼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더 소상하게 알 수 있습니다.

김자옥과 이혼 후 최백호는 현재의 아내 손소인(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손소인은 콘트라베이스를 전공하던 학생이었고, 최백호보다 10살 연하였습니다. 그리고 본가가 미국에 있었죠.

(최백호 아내 나이 차이 10살)(최백호 아내 직업)(최백호 처가)

 

 

최백호: "아내를 처음 만난 건 친구집에서였어요. 친구 부인의 친구였는데, 저보다 10살 연하였죠. 첫눈에 ‘참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감히’ 제 상대로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최백호는 손소인을 우연히 몇번 더 만나게 됩니다. 예식장과 백화점, 그리고 최백호가 노래하는 곳에 친구 부인과 같이 오기도 하죠.

 

최백호: "그렇게 몇 번 보니까 좋더라고요.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했죠. 만나고 싶다고… 심각한 자리를 한번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제 친구가 그러지 말고 자신이 전화할 때마다 자기집에 놀러오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의 집사람이 올 때마다 전화를 한 거예요. 꼬박꼬박 갔죠. 그랬더니 나중에 집사람이 하는 말이 자기가 갈 때마다 내가 있으니까 처음엔 제가 그 집의 하숙생인 줄 알았대요. 그렇게 만났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둘의 결혼을 손소인 집안에서 반대하게 됩니다.

 

 

최백호: "결혼하기 전 처가의 반대가 심해서 내가 물러나야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아내가 굉장히 강한 면이 있거든요. 아마 아내가 아니었으면 결혼 못했을 거예요. 결혼하고 나서도 굉장히 힘들었어요. 제가 돈을 거의 못 벌었으니까요. 고생 많이 했죠. 아마 아내가 처가 도움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아내 덕분에 집도 사고 편안해졌죠. 저는 워낙 돈 욕심 없는 사람이고요."

 

최백호: "장인 어른이 결혼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아마 저라면 끝까지 반대했을 거예요."(최백호 재혼 부인 손소인)

 

어쨌든 결혼식을 올린 후 최백호 손소인 부부는 딸 최솜을 낳습니다

(최백호 배우자 손소인) (최백호 자녀 자식)(최백호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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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호 아내 손소인의 성격과 처가의 도움

 

최백호: "집사람이 좀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전 그런 스타일이 좋아요. 정이 많다는 게 좋은 건 아니거든요. 저는 남남끼리 만나자마자 선뜻 형님 동생 하며 필요 이상으로 친절을 베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부담스럽거든요. 저는 사람을 10년을 만나도 말을 놓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쉽게 뜨거워지는 건 아무래도 쉽게 식는 법이죠."

 

아마 최백호 부인 손소인은 머리는 차갑지만 마음은 따뜻한 여자같네요.

아마 손소인 덕분에 최백호가 좀 더 편하게 음악을 하게 되었고, 1994년의 '낭만에 대하여'도 그 덕분에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 이후 최백호는 가수 생활에 전념하지만 별다른 빛을 보지 못합니다.

결국 1989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한인방송국 라디오DJ로 활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때도 미국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죠.

그러다가 한인방송국이 망하고, 또 본인도 다시 노래를 하고 싶어해서 한국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 낭만에 대하여 발표와 그 뒷이야기

 

그리고 1994년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하는데, 처음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우연히 차를 타고 가다가 이 노래를 듣게 됩니다.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잊겠냐마는 

 

김수현: "차를 타고 가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가사에 꽂혔어요. 중년 여성이 소녀에 마음이 흔들렸다면, 중년 남성들은 ‘도라지 위스키’와 ‘실연의 달콤함’에 절대 공감하지 않을까요?"

 

결국 당시 김수현은 자신의 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장용이 이 노래를 흥얼거리게 했고, 이후 김수현의 예상처럼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납니다.

앨범이 무려 35만장이나 팔렸고,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중이죠(지금은 음원이 더 많이 나감).

 

중견 가수의 앨범 판매량치고는 가히 경이적인 수준인데, 의외로 최백호는 돈을 벌지 못합니다.

 

 

 

최백호: "제 인생을 되돌아봤을 때 가장 좋았던 시절은 50대였던 것 같아요. 다른 게 아니라 50대에 제일 돈을 많이 벌었죠. 많이 벌었다는 의미도 그나마 제 인생에서 그 시기에 돈을 벌었다는 거고요. '낭만에 대하여'가 담긴 앨범은 꽤 많이 팔렸죠. 지금도 계속 팔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게 돌아오는 돈은 거의 없고 수익은 거의 제작자에게 가죠. 그 앨범만 빼놓고 모두 제가 제작했는데, 그것만 그렇게 히트를 친 거예요. 제작하지 말라는 건지…"

 

물론 라디오 DJ도 꾸준히 하고 있지만, 인기 DJ가 아니기에 사실 많이 박봉이죠.

아내와 처가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 최백호 아내에 대한 불만 토로

 

최백호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하여 좀 더 고백합니다.

 

최백호: "담배를 끊고 술까지 줄였더니 누구보다도 아내가 가장 좋아하더라고요. 착하고 사랑스런 아내지만, 아내 때문에 겪는 고통도 있어요. 아내가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거든요. 지난해 연말에 아내가 조리사 자격증 중에서 가장 따기 힘들다는 일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는데…. 자격증을 취득하는 건 좋은데 말이죠. 매번 실습용으로 만든 음식을 먹고 평가해야 하는 고통이 만만찮아요. 어. 이 얘긴 아내가 들으면 충격인데…. 먹고 싶지 않으니 만들지 말라고 타박할 수도 없고, 그냥 실습용 음식을 열심히 먹으며 살고 있습니다. 허허…"

 

최백호: "일식 다음에는 중국 음식이에요. 아내가 중식조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느끼한 탕수육이나 팔보채 등의 음식을 6개월 정도 시식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합니다."

 

왠지 최백호의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 아닌가 합니다.

 

참고로 최백호는 아내의 사진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최백호: "아내가 ‘당신은 연예인이지만 난 그저 평범하게 사는 아줌마’라고 말하곤 해서 TV 출연이건, 인터뷰건 영 응하질 않아요. 그런 면에선 저도 아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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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호 딸과의 불화

 

사실 돈문제와 아내의 요리 테스트외에 최백호에게는 좀 더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딸과의 갈등 문제죠.

 

최백호: "딸이 다섯 살 때부터 미국의 처가에 가 있었어요. 한국에 들어왔다가도 다시 공부하기 위해 나갔죠. 저는 조기 유학은 절대로 시키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한창 예민한 시기를 혼자 보내면, 그 영향이 생각보다 크거든요. 딸이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2년여 살았는데, 거리를 두고 부모를 대하더라고요. 부모인 나는 멀리 있어도 늘 딸 생각을 했는데…. 씁쓸하고 가슴 아팠어요"

 

최백호: "지금은 남자친구가 없는 것 같은데, 저는 딸에게 항상 연애 실컷 하고 결혼하라고 말해요. 결혼은 서른 넘어서 하고 지금은 인생을 즐겨라. 그리고 멋진 놈들이 보이면 무조건 만나라, 그러죠. 물론 제 와이프는 그러면 안 되겠지만요. 얼마 전 딸이 주위에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나이가 어리다고 하더라고요. 다섯 살 더 넘어가면 안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괜찮으니 만나보라고 했어요."

 

아마 최백호가 김자옥과의 첫번째 결혼 실패가 묻어나는 조언같네요.

어쨌든 최백호는 조기 유학 반대론자인데, 그의 경험담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딸이나 아들이 부모를 거리를 두고 대하는 것보다 더 부모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그나마 최백호는 딸 최솜이와 2년을 함께 살면서 조기유학으로 벌어진 틈을 메우는 데 성공합니다.

 

최백호: "딸과 함께 살았던 2년 동안 서로 많이 싸우고 또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렇게 치열하게 싸우고 부딪힌 후에야 딸아이와 좀더 가까워지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죠."

 

 

* 최백호의 인생에 대하여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다만 최백호 김자옥의 경우를 보더라도, 만약 배우자가 정말 아니라면, 일찍 헤어지는 것이 본인과 상대를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둘은 이혼 1년 뒤에 각각 재혼해서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 사회도 이제는 이혼과 재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서로의 성격이 맞지 않아서 헤어지게 된 것뿐이니까요.

다만 선택은 신중하게, 그리고 그 책임은 본인이 져야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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